매거진

‘우리’라는 세계
vogue · 2026년 7월 2일

‘우리’라는 세계

Flower Field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가 선보이는 펜디 2026 가을/겨울 컬렉션은 ‘우리’라는 개념에 주목했다. 개성을 지운다는 뜻은 아니다. 각자의 고유함이 모여 하나의 결과로 완성되는 과정에 가깝다. 비즈로 뒤덮인 ‘바게트’ 가방을 움켜쥔 쌍둥이 모델 서현과 서윤에게 펜디의 새로운 미학을 투영했다.

Connection 목걸이처럼 착용한 칼라 장식은 칼 라거펠트의 스케치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 재미있는 건 남녀 모델이 모두 등장한 쇼에서 오로지 여성 모델만 착용했다는 점이다. “남성복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는 활용도 높은 아이템으로 만든 것이라고 덧붙였다.

In Class 이번 컬렉션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은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를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똑같은 디자인으로 완성된 여성복과 남성복을 나눠 입은 자매의 모습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옷과 가방 모두 남녀가 공유한다. 펜디는 옷을 우리 삶과 감정, 욕망을 함께하는 존재로 되돌렸다.

Nocturnal Animals 얼룩말 패턴과 부드러운 송치 소재를 동일하게 적용한 코트와 가방을 활용해 색다른 트윈 룩을 완성했다.

Two of Us 컬렉션에는 몸과 욕망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옷을 몸의 움직임과 욕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드러내는 존재로 제안하는 것이다. 섬세하게 짜인 레이스를 사용하거나 긴 프린지를 단 드레스처럼 촉각적인 감각을 강조했다.

Bath Time “펜디만의 실루엣을 정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핵심은 바로 코트와 재킷 실루엣이죠.”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는 로고를 활용하는 대신 실루엣을 통해 펜디를 각인시키고자 했다. 의상과 액세서리는 펜디(Fendi).

1989년 펜디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의 1992년 모습.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Maria Grazia Chiuri)의 이력서 첫 줄은 펜디다. 1989년부터 10년간 펜디 가문의 다섯 자매와 함께 액세서리 컬렉션을 선보였다. 이후 발렌티노와 디올에서 더없이 탄탄한 패션 경력을 쌓은 그녀는 2025년 10월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CCO)로 펜디 하우스에 다시 합류했다. 명예로운 귀환이다. “파올라, 안나, 실비아, 가족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오랫동안 일해왔던 이곳에서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죠.” 지난 2월 그녀는 ‘나’보다 ‘우리’에 집중한 데뷔 컬렉션을 선보이며 이에 화답했다. 7월 로마에서 공개될 꾸뛰르 컬렉션 준비로 바쁠 게 분명한 디자이너는 <보그 코리아>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여유와 상냥함까지 갖췄다.

펜디로 돌아온 소감이 궁금합니다. 커리어를 돌아보면, 아주 젊은 시절에 일했던 펜디는 분명 가장 중요한 배움터이자 성장의 자양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일은 막중한 책임감을 안겨줍니다. 동시에 내 시작점과도 같은 ‘집’으로 돌아온 것 같아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도 함께 느꼈죠.

로마로 돌아온 것 역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로마는 어떤 의미인가요? 로마는 말 그대로 나의 도시입니다. 내가 자란 고향이자, 모든 형태의 예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 곳이죠. 언제나 환영받고 있다는 기분을 느낍니다. 로마는 찬란한 역사를 간직한 채 끊임없이 변화하는 수도이기도 하죠. 그런 의미에서 펜디는 곧 로마입니다. 전 세계 도시를 잇는 관계망을 촘촘히 엮어내며, 사람들을 매료하고 문화를 전파하는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요.

펜디로 복귀한 첫날을 기억하나요? ‘첫날’이라고 부를 만한 순간이 워낙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펜디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을 만나고, 펜디라는 생태계를 이루는 생산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거든요. 이 브랜드의 독보적인 품질을 지탱하는 커다란 힘인 장인들의 공방부터 방문했습니다. 이후 팀원들과 함께 테이블에 둘러앉아 첫 컬렉션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어요. 말할 수 없이 아주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지난 2월 2026 가을/겨울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펜디 하우스를 재정의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요? 영감이나 해석을 둘러싼 여러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대신 오늘날의 옷이 어떻게 우리 몸과 공감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집중하고자 했어요. 옷은 착용자의 일상에 함께해야 하니까요. 패션을 바라보는 각자의 개인적인 시선을 자연스럽게 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컬렉션 전반에 걸쳐 주로 검은색을 사용했습니다. 아주 사랑하는 색입니다. 검정은 선택의 포기나 단순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옷의 형태와 디자인을 가장 돋보이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믿어요. 다채로운 소재와 만나 예상치 못한 조합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죠.

칼라를 목걸이처럼 연출했습니다. 여성 모델만 착용했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칼 라거펠트의 스케치를 보다가 그가 칼라를 디자인한 방식에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펜디 자매들이 찍은 사진에서도 칼라가 반복적으로 등장했고요. 그래서 이를 독립적인 아이템으로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활용도 높고 어떤 룩이든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요소로 말이죠. 원한다면 남성복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어요.

런웨이와 가방 스트랩에 등장한 문구 ‘Less I, More Us’는 어디에서 비롯된 건가요? 함께 일하는 가치, 비전과 열망의 공유,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개성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다원성이죠. 펜디 가문의 다섯 자매가 지닌 창의적 비전과 브랜드 역사 전반에 흐르는 작업 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모토입니다.

모피는 펜디 장인 정신의 핵심이지만, 오늘날 패션계에서는 점차 기피하는 추세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냈나요? 펜디 공방의 장인 정신은 경이로운 수준입니다. 세계적으로도 독보적인 최첨단 가공 기술을 보유하고 있죠. 오늘날 모피 사용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컬렉션의 첫 번째 축에서는 자재를 새로 구하는 대신 공방 아카이브에 보관된 것을 활용했습니다. 일종의 ‘재단의 재생(Sartorial Regeneration)’이죠.

모피 관련 새로운 프로젝트 ‘에코 오브 러브(Echo of Love)’는 무엇인가요? 펜디는 1958년 로마 그랜드 호텔에서 ‘컬렉션 오브 러브(Collection of Love)’를 선보였습니다. 공방에 남아 있던 모피를 다시 재단하고 패턴화해 완성한 컬렉션이었죠. ‘에코 오브 러브’는 바로 그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고객이 기존에 갖고 있던 모피를 펜디 아틀리에와 협업해 리폼하는 거죠. 옷의 수명을 연장하고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이는 개인의 가치나 취향을 넘어 보존이라는 집단 차원의 실천으로 이어지죠. 그 보존은 곧 소재를 돌보는 행위가 됩니다. ‘정서적 내구성(Emotional Durability)’이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옷이 착용자와 함께 변화하며 경험과 의미를 축적하는 아카이브로 기능하는 겁니다.

액세서리 역시 하우스의 핵심 요소입니다. 런웨이에 등장한 많은 가방 중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디자인이 있나요? 액세서리는 펜디의 중심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나는 늘 액세서리와 함께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펜디에서 훈련을 받았고, 가방을 디자인할 때면 언제나 큰 희열을 느끼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며 ‘바게트’ 가방에서 출발하고 싶었습니다. 바게트는 현대 패션사에서 진정한 아이콘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가방의 본질을 바꾸기보다는 시대를 초월한 무한한 존재에 새로운 창의적 아이디어와 다양한 변주를 더해보고 싶었습니다.

컬렉션에는 사그 나폴리(SAGG Napoli), 미렐라 벤티볼리오(Mirella Bentivoglio)의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두 가지 협업이 포함되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여성과 지속적으로 연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여성 예술가, 작가, 지식인, 활동가와의 관계는 세계를 보는 시야를 넓혀주었고, 개인적인 성장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동시대 여성과 남성을 위해 만든 옷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표현하면서, 어떻게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행동과 의도,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컬렉션을 완성하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패션이란? ‘이상적인 패션’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패션의 의미는 개인적, 사회적 변화에 따라 계속 달라지기 마련이니까요. 다만 패션은 여러 가능성과 잠재력이 살아 숨 쉬는 실험실이죠.

디지털 세계가 확장되고 Z세대가 강력한 소비층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패션을 어떻게 바라보나요? 새로운 소비자는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패션에 접근합니다. 특히 소셜 미디어를 통해 매우 빠르게 패션을 소비하죠. 동시에 그들은 패션이 단순히 창의적 현상을 넘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으로 작용할 미래에 대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나 역시 오늘날 패션을 만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매일 스스로에게 묻곤 해요. 그렇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훌륭한 출발점이죠.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길 바라는 것이 있나요? 솔직히 말하면 나는 변화를 좋아합니다. 늘 변화를 해석하고, 그 흐름의 일부가 되려고 노력하죠. 다만 내 작업의 바탕에는 나만의 분명한 시각과 미학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내가 하는 일을 알아봐주는 하나의 특징으로 오래도록 남길 바랄 뿐입니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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