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패션계에서 주목받는 뜻밖의 신체 부위가 있습니다. 바로 ‘힙’입니다.
Acielle/StyleDuMonde
패션계는 어쩌다 여성의 엉덩이와 골반을 강조한 디자인을 선보이게 된 걸까요? 그 배경에는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서는, 상당히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디자이너와 패션 하우스는 향후 몇 달간 어떤 실루엣, 색상, 소재가 트렌드가 될지 보여주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가끔은 이를 위해 특정 신체 부위를 특별히 부각시키기도 하죠.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이 지난 뒤 그 부위를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하기도 하고요.
예를 들어, 1940~1950년대 여성의 허리는 극도로 잘록하게 조인 모습으로 강조됐습니다. 1960년대에는 자유분방하면서도 파격적인 감성이 퍼져나간 덕분에 다리를 완전히 드러내는 미니스커트가 대중화됐죠. 1980년대는 모두가 알다시피, 압도적으로 넓은 어깨, 즉 ‘파워 숄더’가 특징인 시대였고요.
엉덩이가 패션계의 주목을 끈 건 이전에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톰 포드가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던 1990년대, 그는 살짝 드러나는 끈 팬티를 활용해 자연스럽게 엉덩이로 시선이 향하게 만들었죠. 이어 2000년대에는 Y2K 트렌드가 급부상하며 배를 드러내는 크롭트 상의가 일상적인 패션으로 자리 잡았고요. 가장 최근에는 몸 전체가 드러나 보이는 네이키드 드레스가 트렌드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AlaÏa 2026 F/W RTW
이처럼 패션은 어떤 시대에는 성적 해방을, 또 어떤 시대에는 권력의 재탈환을, 또 다른 시대에는 자기 결정권을 이야기했습니다. 신체의 특정 부위를 확대해 보여주는 패션의 접근 방식은 결코 우연의 일치이거나 임의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의 눈에 띈 부위는 ‘힙’이었습니다. 힙은 다수의 2026 가을/겨울 컬렉션 쇼에서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알라이아입니다. 드레스 골반 부분에 전략적으로 주름을 배치해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을 몸의 중심부로 이끌었죠. 허리선이 아래로 내려와 골반을 감싸듯 길게 이어지는 ‘바스크(Basque) 스타일’을 적용한 디자인으로, 로코코 시대와 빅토리아 시대의 드레스 실루엣을 연상시켰습니다.
Chanel 2026 F/W RTW
샤넬 역시 쇼를 통해 비슷한 암시를 했습니다. 힙 라인을 따라 곡선으로 이어지는 꽃 모양의 파이핑(Piping) 디테일이 눈에 띄었죠. 다만 알라이아보다는 훨씬 절제된 방식이었습니다.
디올은 컬렉션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요소로 풍성한 볼륨을 내세웠습니다. 특히 브랜드를 상징하는 아이템인 ‘바 재킷’을 비롯한 여러 상의를 통해 이를 강조했죠. 가늘게 조인 허리 아래로 넓게 퍼지는 페플럼 실루엣은 힙 라인을 분명하게 부각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에르뎀은 비율을 가지고 노는 듯한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드레스와 스커트 모두 허리에서 힙으로 갈수록 라인이 훨씬 풍성해지는 형태였거든요. 마치 과장된 모래시계 같은 실루엣은 단연 눈에 들어왔습니다.
Dior 2026 F/W RTW
Erdem 2026 F/W RTW
패션사적 참고 대상이 매우 분명히 드러난 브랜드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생 로랑이에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토니 바카렐로는 치마 양옆을 넓게 퍼져 보이도록 해주는 구조물 ‘파니에’를 활용한 검은색 레이스 드레스를 선보였죠. 바로크 시대의 양식과 파티 걸 스타일을 결합한 이 드레스는 배우 조 크라비츠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올해 멧 갈라에 직접 입고 등장할 정도로 말이에요.
맷 갈라에 참석한 조 크라비츠. Getty Images
스텔라 맥카트니 또한 힙의 귀환을 인상적으로 보여준 브랜드 중 하나입니다. 런웨이 위 여러 룩에서 힙 라인이 당당하게 솟아 올라 있었거든요. 섬세한 캐미솔 톱에서도 이런 실루엣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보다 절제되고 일상적으로 입기 편한 형태이긴 했지만 말이죠.
준야 와타나베는 무거운 갑옷을 연상시키는 아방가르드 룩으로 힙을 강조했습니다. 장 폴 고티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듀란 랜팅크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 힙을 극적으로 연출했고요. 하나는 바깥으로 넓고 둥글게 확장되는 한편, 다른 하나는 무대 커튼을 떠올리게 할 만큼 과도하게 주름을 잡아 표현했죠.
Stella McCartney 2026 F/W RTW
Junya Watanabe 2026 F/W RTW
무대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힙 라인이 넓은 옷은 무대의상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새 앨범 <럭스(Lux)>를 발표하고 월드 투어를 진행한 가수 로살리아입니다. 그녀는 16세기 여성들의 헤어스타일을 모티브로 한 모자 브랜드 ‘비바스카리온‘의 오버사이즈 햇과 새틴 브라, 그리고 맞춤 제작한 파니에 스커트로 구성된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랐죠. 이번 북중미 월드컵 개막식 무대에 선 가수 케이티 페리 역시 파니에 드레스를 착용한 모습이었고요.
2026 브릿 어워드에 참석한 로살리아. Getty Images
힙 라인이 패션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해, ‘예전에도 하던 것들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거예요. 사실 맞는 말이긴 합니다. 이 트렌드 역시 많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거든요. 오히려 거슬러 올라가면 마리 앙투아네트 시대, 낭만주의로 가득 차 있던 과거의 의상과 비슷한 느낌이죠.
최근 패션을 비롯해 문학과 영화 등 다양한 문화적 영역에서는 낭만주의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고전문학이 다시 인기를 얻고, ‘폭풍의 언덕’ 같은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는 그 시대 특유의 화려하고 극적인 미학을 다시 화면에 쏟아내고 있죠. 오랫동안 패션의 중심에 있던 미니멀리즘이 물러나고, 전반적으로 화려한 스타일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거예요. 프릴, 러플, 레이스, 코르셋과 파니에 스커트를 활용한 극단적 실루엣이 대표적입니다.
Dior Fall 2026 Couture
낭만주의의 부활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왠지 지금과 달리 편견 없이 쾌락을 누렸을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집단적 욕망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직접 살아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지만, 지금의 우리보다 더 솔직하게 삶을 즐겼던 것처럼 보이는 때로요. 마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등장인물들처럼요. ‘현실 도피’는 디자이너들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창작 도구 중 하나이고 말이죠.
하지만 낭만주의의 대두만으로 힙의 귀환을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변화는 사실 여러 측면에서 흥미롭거든요. 힙, 즉 넓은 골반은 전통적으로 여성성의 상징이었습니다. 문화사적으로도, 진화생물학적으로도 생식력, 출산 능력을 보여주는 표식이었죠.
Jacquemus 2026 F/W RTW
Jacquemus 2026 F/W RTW
여성의 힙을 비롯한 신체를 둘러싼 담론은 최근 몇 년간 외부의 여러 세력에 의해 더욱 활발히 다뤄지고, 정치적으로 이용되며, 도구화되어왔습니다. 다시 한번 여성의 몸이 정치적 쟁점이 된 거예요. 그와 동시에 감시되고, 통제되고, 지배돼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고요. 이런 시각에서, 최근 패션 하우스들이 내놓은 디자인은 모든 것에 정면으로 맞서 외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야, 내 엉덩이에서 손 치워!”라고 말이죠.
약 26년 전에도 힙은 패션계에서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허리선이 낮은 ‘로우 라이즈’ 스타일이 유행했을 때 말이에요. 허리를 넘어 힙 아래에 걸치는 스타일의 바지 때문에 자연스럽게 힙에 눈길이 갔으니까요.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분명히 다릅니다. 당시 이 스타일을 소화하려면 극도로 마른 몸매라는, 굉장히 엄격한 미적 기준을 따라야만 했거든요.
북중미 월드컵 개막식에서 공연한 케이티 페리. Getty Images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넓은 힙은 결점 취급을 받았습니다. 많은 여성들의 ‘고민 부위’ 중 하나였죠.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닙니다. 이제 디자이너들은 힙을 감각적인 기념비처럼 기리고 있죠. 힙이야말로 관능성, 강인함, 그리고 자기 결정권을 상징하는 부위니까요. 과감하게 넓어진 디자인은 주변과의 물리적, 상징적 거리를 만들어주고요. 힙이 그 자체로 자유로울 수 있게끔 말이죠. ’파워 숄더’의 시대는 지나고, 이제는 ‘파워 힙’의 시대가 시작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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